선교지에 맞는 예배 모범

  • 05/06/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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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다큐멘타리] 최하영 목사/ GMS 우크라이나선교사 – <2회>

그 선교지의 하나님을 만나게 해야 할 것…

선교사가 선교지에 파송되어 가면 한국의 예배 모범과 교회헌법을 접목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말씀과 복음을 보존하면서 그들의 문화와 전통에 맞는 예배모범이 되도록 해야 한다. 한국의 하나님이 아닌 그 선교지의 하나님을 만나게 해야 할 것이다…

나의 아내는 가끔 화초 잎을 물에 담가 솜털 같은 뿌리를 내게 한 다음 화분에 심어 놓는다. 그 잎의 뿌리로부터 새로운 싹이 나오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그 새싹들이 자라면서 그 원 잎은 서서히 죽는다. 이것을 선교적으로 적용한다면, 다른 문화권에 온 선교사가 그 문화권에서 겨우 뿌리를 내린 다음 오랜 시간이 지나 겨우 현지인을 양육하고 그 현지인을 통해 풍성한 열매를 맺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예수님은 완전히 그렇게 사셨다. 만 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가장 낮은 곳인 마구간에서 나셨고 갈릴리 나사렛에 목수의 아들로 30년간 사셨다가 3년간 공생애에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아주 다양한 사람을 만나 가르치고 고치고 섬기셨다. 그리고 우리 죄를 위해 화목제물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셨고 무덤에서 삼일만에 부활하셨다. 그리고 그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다는 것을 믿고 알도록 성령을 보내주셔 우리 안에 계신다. 이렇게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요 참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셔서 성육신 되어(incarnation)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하는 지를 친히 보여주셨다.

나의 첫 담임목회는 1994년 서울 신림동에서의 개척이다. 어느 날 구로에 있는 교회에서 부목사로 섬기고 있었는데, 몇 분의 장로님과 집사님들이 오셔서 함께 개척하자고 했다. 그들은 주변 다른 교회에서 30여명이 나온 그룹이었다. 마침 담임목사께서 은퇴하시고 새 담임목사가 부임하여서 나가야할 상황인지라 그들의 청빙에 응하였다. 그런데, 30대 초반인 햇병아리 목사인 나는 참으로 나름 정통보수적으로 목회를 했다. 오히려 나를 청빙한 경험 많고 유능한 성도들이 나를 달래고 얼렸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미안한지 모른다. 사실 그들은 많은 상처를 받고 새롭게 하려고 나왔는데, 나는 그들 그룹의 정서와 마음을 잘 보살펴드리지 못했다. 그래도 1년만에 70여명 성장하여 더 큰 건물을 임대하기 위해 기도원에 올라갔었다. 그때 대학생때 선교사로 가기로 작정했던 기억이 주님의 음성으로 들려 동기 목사에게 그 개척교회를 이양을 하고 선교훈련을 받고 선교지로 왔다.

1996년 나는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Uzbekistan Samarkand)에 이미 1년전에 연세 드신 여자선교사가 개척한 곳에 부임하였다. 그 선교사는 1년 동안 얼마나 헌신적으로 그 지역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사랑을 베풀었는지 병(burnout)이 나셨다. 그 전통 이슬람 지역에 좋은 이미지를 심어 놓았던 것이다. 이렇게 나는 잘 갈아 놓은 좋은 밭에 복음의 씨를 뿌렸다. 돌아보면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임을 고백한다(고전 3: 6).

1937년 사할린에서 강제 이주되어 왔던 2, 3세대 한국동포 고려인들 중심으로 정부의 새종교법이 나오기까지 4년 동안은 참으로 열심히 사역을 감당하였다. 그리고 시내 가난한 지역에 의료진료소까지 운영하였다. 그러면서 한국 교회 예배 모범와 그 열정적인 신앙을 그대로 전수하였다. 새벽기도와 수요예배 겸 교사훈련, 금요철야예배, 주일예배를 드리고 수시로 젊은이들과 나무가 그리 많지 않은 돌 산에 올라가 바위를 붙잡고 기도하곤 하였다. 그렇게 꼭 10년만인 2006년에 다른 사람을 개종하여 사회를 혼란했다는 죄목으로 추방되었다.

다시 2008년에 우즈베키스탄 수도 타슈켄트(Tashkent)로 재배치되어 복음의 접촉점과 비자해결을 위해 학원을 운영하면서 비밀히 영적 지도자들을 세웠다. 그리고 동료 선교사 1명과 제자인 현지 목사 3명과 함께 교회헌법을 만들어 노회를 조직하도록 기초를 놓았다. 많은 교회헌법 자료를 참고했지만 결국은 내가 속한 한국의 교회헌법이 기준이 되었다. 2010년에 비밀히 자신의 이름을 바꿔 그룹으로 모여 사람들에게 과제를 주어 종교 활동했다는 죄목으로 두번째 추방을 맞이하였다.

그 후 8년이 지난 2018년에 우즈베키스탄에 다시 들어갈 수 있었다. 내가 처음 섬겼던 교회는 벌써 3대인 현지인 목사가 담임을 하고 있었다. 그는 내가 심어 놓은 한국형 목회와 예배모범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그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 2011년 우즈베키스탄에서 동유럽 우크라이나(Ukraine)로 재배치되어 현지교회를 순회하면서 설교 및 특강 등으로 섬겼다. 그러면서 그 현지교회의 예배형식과 신앙의 양식 등을 많이 배울 수 있었다. 그래서 내가 전수한 우즈베키스탄의 한국형 예배 모범을 보면서 어딘가 낯설어 보였다.

그렇다면, 우즈베키스탄의 현지교회와 성도들의 신앙과 신학은 어떤 것일까? 1세기 사도 도마와 그의 제자 아다이(다대오)와 또 아다이 제자 아가이와 마리를 통하여 이 북방 우즈베키스탄까지 복음이 전하여 졌다. 그리고 5세기 중엽에 사마르칸트에 네스토리안(Nestorian) 대주교구도 세워져 실크로드따라 유목민에게 복음의 전초기지 역할을 하였다. 그랬던 우즈베키스탄은 8세기 우마야드 이슬람 왕조(Umayyad, 661~750)의 영향으로 천년이 넘게 이슬람 전통과 문화를 이어오고 있었다. 이렇게 현재 우즈베키스탄의 90%가 무슬림이고 그 중 80%가 수니파(Sunni)이고 20%가 시아파이다.

수니 이슬람은 전통 이슬람으로 이슬람의 전통 및 의식을 잘 지킨다. 이들이 예수님을 만나면 상당히 역동적 영성을 갖는다. 자주 꿈에 예수님을 만났다고 한다. 그리고 어떤 때에는 꿈에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을 전하라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어떤 때에는 우즈벡 전통 악기에 맞는 유명한 대중가요에 찬양가사를 붙여 부르곤 하였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이런 모든 것에 한국의 예배모범에 따라 가르치기에 바빴었다.

한편, 우크라이나인은 슬라브족(Slavs)이면서 유럽인(European)으로 자존심과 우월주의가 강하다. 그래서 동양에서 온 나에게 마음을 여는 데는 상당한 시간과 검증이 필요했다. 풀러(Harold Fuller, SIM)는 선교 이양의 단계로 개척자 단계(pioneer stage), 부모 단계(parent stage), 동역자 단계(partner stage), 참여자 단계(participant stage)로 분류하였다. 그러나 제3세계 선교사가 유럽인에게는 반대로 참여자 단계, 동역자 단계, 부모 단계, 그 후 그들의 자원을 활용하는 개척자 단계로 나가야 한다.

우크라이나 교회의 중요예배는 주일예배이다. 그래서 모처럼 모이는 예배에 다양한 순서가 있어 보통 2~3시간 소요된다. 담임목사가 교회를 이끌어가지만 모든 일에 상의해서 한다. 그리고 사례가 따로 없기에 목사도 주중에 일을 해야 한다. 결혼한 여자는 머리에 두건을 쓰고 치마를 입는다. 여자는 설교할 수 없고 간증이나 찬양은 할 수 있다. 그리고 추수감사절은 이웃교회끼리 연합해서 한다. 또 이렇게 품앗이하듯이 순회하면서 예배한다.

특히 우크라이나 개신교는 공산(Communism, 1917~1991) 73년 동안 많은 순교의 역사를 갖고 있어 그 자부심이 대단하다. 그러나 1991년 독립 이후 자본주의 영향으로 그 조상들의 순수신앙이 많이 변질되었다. 현재 우크라이나 전체 인구 중 정교회 교인은 65%이고 비종교인(무신론 포함)이 25%이고 개신교는 2%이다. 따라서 우크라이나는 공산치하 그들의 조상들의 순교정신 회복이 절실하다.

1986년 칸 영화제(Festival de Cannes)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롤랑 조페(Roland Joffe) 감독의 미션(The Mission)은 18세기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식민지인 남아메리카 과라니족(Guaraní)에게 순교하기까지 선교한 예수회(Jesuit) 가브리엘(Gabriel) 신부와 그 동료 필딩(John Fielding) 신부, 한때 과라니족을 노예로 팔았던 로드리고 멘도사(Rodrigo Mendoza)가 회개한 후 수사가 되어 선교에 동참하여 또한 순교하는 이야기다. 참으로 감동적이고 어떻게 선교적으로 현지인에게 접근하여 그들과 동화되어 성육신적 삶는 사는가를 보여준다. 그들은 죽기까지 과라니족과 함께 하였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그 과라니족에게 교회를 지어주고 성경을 가르쳐 문명화 시켰다면, 그 종족의 리더가 종족에게 세례를 베풀고 그 종족이 예배를 집례하고 그 종족이 순교의 지도자가 되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해 본다. 어쩌면, 그들의 문화와 상황에 맞는 그리고 그들이 주도하는 교회가 세워졌더라면, 교황의 특사로 온 알타미라노(Altamirano) 추기경이 그 아름다운 교회 건물로부터 떠나라 할 때 그 과라니족이 살 곳은 정글의 넓고 넓은데, 그러기에 굳이 순교의 제물이 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결국 선교사가 영웅이 되지 않았나 조심스럽게 진단해 본다.

그러므로 선교사가 선교지에 파송되어 가면 한국의 예배 모범과 교회헌법을 접목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말씀과 복음을 보존하면서 그들의 문화와 전통에 맞는 예배모범이 되도록 해야 한다. 한국의 하나님이 아닌 그 선교지의 하나님을 만나게 해야 할 것이다.

필자: 최하영 목사/ hydavidchoi@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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