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과 동행하는 길, 그길로 나아갑니다

  • 10/09/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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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칼럼]  이창배 본지 발행인

그 길이 좁은 길이고, 좁은 문이고, 사는 길이다.

그리스도인에게 복음 진리는 생명이다. 이머징처치(Emerging Church) 라는 말은 사라져야 한다. 더 이상 복음진리의 회색지대는 없다. 우리가 어떤 싸움을 할 것인가? 이제 그 목표를 분명히 해야할 시점에 다다랐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길, 바른 신앙, 복음진리의 깃발을 높이 들자. 그 길이 좁은 길이고, 좁은 문이고, 사는 길이다. 우리 함께 그 길로 가자!

한 지역교회의 담임으로 교회를 섬기는 동안 불려진 목회자라는 현직을 지난 2019년 12월로 내려놓고, 지금은 유크EKCNews.com의 CEO로, 유럽크리스챤신문의 발행인 및 대표로 사역을 하고 있는 중이다. 현직에 있을 때엔 그리 선명치 않았던 어떤 문제가 지금에 이르러 부쩍 뚜렷해지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이머징처치(Emerging Church)에 관한 논제이다. 적어도 필자는 그런 논제와 관련이 없는 것처럼 생각했고, 예외란 생각을 가졌었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우리는 복음과 진리에 대해서는 엄격 했고,  그 어떤 물타기도 전혀 용납치 않았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대다수의 한국교회가, 아니 대다수의 목사들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 본다.

이머징처치(Emerging Church)에서 이머징(Emerging) 이란 단어가 가지고 있는 함의를 살펴보자면,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 되는 경제용어에서  쉽게 이해가 가능하다. 이머징펀드, 이머징시장 등 눈에 많이 들어온다. 이머징이란 영어로 ‘Emerging’ – 최근 생겨난, 최근에 만들어진, 떠오르는- 뜻을 내포한다. 즉 경제용어로 볼 때 떠오르고 있는 비즈니스 부분을 말한다.  이 관점을 교회로 돌려서 살펴본 미국의 크리스채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 2006년 커버기사가 세간에 회자가 됐다.

최근 떠오르고 있는 교회라고 해석을 한다면, 새로이 대중적으로 부상하고 있는 교회, 대형교회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지는 일종의 트랜드의 경향을 짚어낸 것이라 하겠다. 전통적 기독교 메시지가 너무 엄격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진, 세상문화에 친숙하고 시대정신에 민감한 사람들에게 상당한 인기를 끌면서 등장한 새로운 흐름의 한 부류이다. 무엇보다 성경을 권위주의 적으로 깐깐하게 적용해야만 세속적이고 불경건한 행동을 개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교회들에 질려 있는 젊은이들에게는 특히 매력적이라 할 수 있고,  실제로 이런 사고들이 복음주의 교회 전반에 암적인 요소로 퍼져가고 있던 상황에서 나온 이슈인 셈이다. (이 부분은, 존 맥아더 목사, 진리전쟁, 10-11페이지, 2007년, 생명의말씀사에서 인용함)

지금쯤 이러한 신앙적 토대에서 자라난 주류세대가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 교회들의 중추를 이루고 있지는 않은 것인지 우려가 되는 부분이다. 우리가 익숙하게 사용하는 말 가운데, “은근슬쩍”이란 용어가 있다. 말 그대로, “쉽게 드러나지 않도록 살짝이~” 무엇을 한다는 말에 덧부쳐 사용 되는 부사이다.  곧, 이말은 다시 성경적인 복음진리를 희석시켜서 민감한 부분은 은근 또는 아예 가려버리거나 드러내지 않도록 해야만 세속적 사고와 맞물려 소통이 가능하다는 말에 더 가깝다.  어찌 본다면 사람에게 좋아보이려는 시도이다.

분명 교회의 성장에 맞닿아 있다고 본다. 사람이 모여들 조건을 만드는 시도이고, 그런 환경 조성에 있어서 복음의 진리를 희석한다는 것만큼 매력적인 것이 또 있을까 싶다. 하지만 존 맥아더 목사는 이 책에서 “진리는 세상 모든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이다. 교회를 “진리의 기둥과 터”(딤전3:15)라 하지 않던가.”라고 썼다. 또한 맥아더 목사는 ‘진리전쟁’, 12-13페이지 글에서 초대교회 순교자를 언급했다. 익나티우스(Ignatius)와 폴리캅(Polycarp)이다. 이 두 사람은 사도 요한의 가까운 친구요, 제자로 그리스도를 포기하고 진리에서 등을 돌리기 보다는 기꺼이 생명을 바쳤던 이들이다.

폴리캅기념교회 천장 벽면에 그려진 순교 그림

로마 황제 트라얀(Trajan)은 익나티우스(Ignatius)에게 ‘우상 앞에 절해 로마에 대한 충성심을 입증 하라’ 강요했다. 이때 익나티우스(Ignatius)는 한번만 굽혀 절을 했다면, 그 주위 사람들이 그에게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형식적으로라도 조금 굽혀주고 목숨을 건지기 바랐지만, 그는 차라리 죽음을 택했다. 경기장 안에 굶주린 맹수들을 풀어놓고 거기로 던져 맹수들의 먹이가 되게 했다.

또한 폴리캅(Polycarp)은 익나티우스(Ignatius)의 친구이다. 그에게는 피에 주린 폭도들이 지켜보는 경기장 한 가운데 세우고는 그리스도를 저주하라 강요했다. 그러나 폴리캅(Polycarp)은 죽음을 택했다. 그가 남긴 유명한 말이 지금도 성도들의 마음을 울리고 있다. “86년간이나 섬겼으되 한 번도 잘못된 길로 가게 하지 않고 나를 구원하셨던 왕을 어찌 내가 욕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는 산 채로 불에 태워져 죽임을 당했다.

필자는 올해 2월에 터키, 이즈미르에 있는 폴리캅 기념교회당을  둘러봤다. 교회당 안쪽 강단이 있는 오른쪽 천장에 비스듬히 그려져 있는 ‘순교 당하는 폴리캅’의 벽화를 보았다. 마음에서 깊은 감회가 서렸고, 입술에서는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주여!”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함께 그곳을 방문한 프랑크푸르트 교회협의회 목회자들의 마음도 한결 같았던 모양이다.

오늘날 진리가 흐려지고, 진리를 확실하게 드러내는 교회와 목회자, 성도들을 향해서 오히려 불편하게 여기는 경향이 매우 진하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진리를 위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면서 재미있게 살고, 교양을 갖춘 지성인으로, 점잖은 품위를 지키는 도덕적이고 예의바른 사람으로, 적당한 그리스도인으로 그렇게 봐주기를 바란다는 것을 잘 안다. 그렇기에 이같은 진리싸움에서 단호하게 생명을 던지는 순교자의 피와 정신이 흐르는 그림 앞에서 가슴에 느껴지는 감동은 남다를 수밖에 없었을 듯 싶었다.

초대교회의 유적을 밟는 수일내내, 지금까지도 그 울림이 마음에 가득했다. “나는 정말 복음진리를 지키기 위해 생명을 던질 각오로 목회 했는가?” 오히려 얼마나 수없이 타협하려고 했던 것은 아닌지 하는 자성의 시간을 가졌고, 비록 전부는 아닐지라도, 초대교회 유적을 밟는 동안 진리를 지키기 위해 생명을 초개와 같이 던진 사람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살다간 성도들의 발자취에 훨씬 못 미치는 내 모습을 자각하고, 무거운 마음을 안고 독일로 돌아온 것이다.

오늘날 주위에서 그저 인격적이고, 지성적이고, 근사한 교회의 이름을 위하여, 명망있는 이름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부질없이 정력을 쏟아내는 많은 이들을 접해 보았다. 언론 분야의 특성상 비교적 많은 사람을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을 떠올리면 나 자신이 부끄러울 때도 많다. 과연 저 사람의 안에 그리스도가 계신지 그것이 궁금할 때도 많았다. 비단 사역자들 뿐만 아니다. 일반 성도들 가운데도 그런 터무니 없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얼마전 잘 알고지내는 선배 목회자의 가정을 방문했었다. 50년 목회를 한 분이다. 숱하게 좋은 설교를 남기기 위해 공부 했고, 자료를 모아 책을 내려고 꼬박꼬박 원고를 작성해 쌓아놓은 것이 서재에 가득하다. 그런데 최근 방문했을 때, 사모와 함께 그 많은 원고를 꺼내어 남김없이 찢어냈다는 말을 들었다. 더는 붙잡고 있을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목회를 할 땐 몰랐는데, 은퇴 후 지난 날을 돌아보면서 얼마나 후회가 되는지 모른다고 했다. 그 마음에 이심전심으로 동감이 됐다.  그래서 얼마나 존경스런지, 또한 고마운지 모른다.

이머징처치(Emerging Church)는 그런 면에서 ‘근사한 교회’를 연상시키는 용어이다. 세상의 불신자들이 그런 눈으로 자신들의 교회를 봐주기를 바라기에,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진리에 대해서 그 건강성 여부를 따지려들지 않는다.  마치 기업이 자기 브랜드 관리를 하듯이, 시대의 조류를 따르는 것이 대세란 그런 생각에 젖어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금 생각을 해봐야 한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진리를 위해 살고, 진리를 위해 죽을 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 복음 진리를 담대히 선포하는 일을 조금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그런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 하겠다.

지금, 우리는 이전에 한번도 경험해 보지 않았던 COVID19 곧, 중국 우한 바이러스로 인한 펜데믹을 맞이했다. 독일을 비롯한 유럽 전지역이 몸살을 앓고 있다. 세계2차대전 이후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었다. 수없이 많은 기업들이 존망의 기로에 처했다. 이미 입은 그 손실로 헤아리기조차 어려울 정도이다. 기독교는 또 어떤가? 전쟁 때도 쉬지 않았던 예배가 중단이 되는 초유의 사태를 맞았다.

지역에 따라 편차가 다르겠지만, 국가적 위기상황이란 명분으로 교회 스스로가 문을 닫았다가 현재는 지역적, 또는 부분적으로 열기는 했어도 사회적 거리두기를 엄격하게 적용하고 있다. 좌석 예약시스템이 도입되어서, 미리 예배 출석 통보를 한 성도들의 이름표를 의자에 부착하고, 그 자리에 앉힌다. 물론 사전 예약이 안 된 사람은 예배당에 입장할 수 없다. 사람과 사람의 거리를 1.5미터 유지를 해야 하고, 찬양팀과는 4미터의 간격을 두어야 하고, 예배 후 친교도 갖지 못한다. 그저 눈 인사 정도만 하고는 헤어져야 한다.

이런 교회의 모습을 전에 상상이나 해 보았던가? 과연 앞으로 교회는 어떻게 변화를 겪게 될 것인가? 정말로 목숨을 걸고 예배를 드리고, 세상의 안목에 두려움을 갖지 않는 담대한 그리스도인 만이 남게 되는 것은 아닐지? 우한 코로나가 언제쯤 종식이 될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기간이 결단코 짧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부터 교회는 무엇을 해야할까? 아니 사명자는 어떻게 해야할까?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 앞에 순결한 신부로 서게 될 그런 성도를 생명을 걸고 만들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결론이다. 그리스도인에게 복음 진리는 생명이다. 이머징처치(Emerging Church) 라는 말은 사라져야 한다. 더 이상 복음진리의 회색지대는 없다. 우리가 어떤 싸움을 할 것인가? 이제 그 목표를 분명히 해야할 시점에 다다랐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길, 바른 신앙, 복음진리의 깃발을 높이 들자. 그 길이 좁은 길이고, 좁은 문이고, 사는 길이다. 우리 함께 그 길로 가자! (20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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