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세계관의 이해-<5회>

  • 11/07/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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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저널] 최용준 목사/ 한동대 교수

2. 기독교 세계관

인간은 환경에 대한 책임이 있다. 나아가 인간에 의해 이 세상은 계속 발전해 나간다는 의미에서 창조는 완성을 지향한다(Creation points to consummation). 따라서 창조란 하나의 ‘오픈 시스템’(Open System)이다.

2-1 창조와 타락

나아가 이 세계는 정적(static)이지 않고 매우 동적(dynamic)이다. 가령 창세기 2장에는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살고 있지만 계시록 21장에는 새 예루살렘이라는 도시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게 된다. 정원(Garden)에서 도시(City)로 변화된 것이다. 인간은 이 동산을 잘 ‘개발’하는 동시에 ‘보존’해야 한다.(창 2:15) 즉 인간은 환경에 대한 책임이 있다. 나아가 인간에 의해 이 세상은 계속 발전해 나간다는 의미에서 창조는 완성을 지향한다(Creation points to consummation)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창조란 하나의 ‘오픈 시스템’(Open System)이다. 튤립이 아름답게 피듯이 이 세상도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에 의해 다양하게 펼쳐질 수 있는 가능성들이 있다. 노트북이 열리면 다양한 기능을 발휘하듯 세계는 여러 가능성을 향해 열려있다. 따라서 우리의 삶은 창조주의 뜻에 따라 올바르게 응답하며 살아가야 하며 그 삶에 대해서는 책임져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응답하는 존재(Homo Respondens)’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성경적 시간관과 역사관은 불교나 힌두교 또는 유교 등과 같이 만물은 돌고 돈다는 윤회사상과는 반대이다. 불교의 상징은 바퀴인데 그것은 모든 것은 돌고 돈다는 사상을 의미한다. 이 순환적 시간관은 자칫 운명론(fatalism)에 빠지기 쉽다. 반면에 기독교 세계관은 시작과 끝이 있는 직선적인 역사관이라고 말할 수 있다.

창조가 있으면 완성이 있다. 그래서 성경 제일 마지막인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은 처음이요 마지막이며 시작이요 끝이며 알파와 오메가라고 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의 삶에 약간이 반복적인 요소는 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역사에는 방향성이 있다는 뜻이다.

창조 세계는 언약성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해가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동쪽에서 뜨지 서쪽에서 뜨지 않는다. 지구가 23.5도 기울어져 하루에 한번 도는 것도 일정하다는 것이다. 나아가 지구가 일 년에 한번 태양을 도는 것도 변하지 않는다. 이것은 모두 이 세상을 지으신 창조주께서 그 법칙을 신실하게 지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레미야라고 하는 선지자는 이것을 33장 20-21절 및 25-26절에서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의 일정한 법칙을 신뢰하면서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창조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포함한다. 즉 이 세상의 만물은 지어진 존재이다. 따라서 이 세상에 그 어떤 것도, 그 누구도 절대화될 수 없고 오직 창조주만 절대 주권(sovereignty)을 가진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성경은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우상화시키는 것을 금한다. 사람이 신격화되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사람은 분명히 한계가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지요. 반대로 창조주의 주권, 왕되심(Kingship) 및 주되심(Lordship)을 인정한다면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 분을 온전히 인정해야 함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신앙과 삶을 분리하는 이원론적 세계관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창조된 이 세상은 창조주의 능력과 신성을 보여준다. 사진처럼 매우 장엄한 경치를 볼 때 우리는 그 경치에 놀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작품을 만든 창조주가 있다면 그 분은 대단한 능력을 가진 분이실 뿐만 아니라 그 분의 신성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의 어떤 정교하게 만들어진 제품을 보면서 우리가 그 제작자의 기술에 감탄하는 것처럼 말이다.

나아가 이 세상은 창조주의 지혜도 보여준다. 우주만물이 매우 정교한 법칙에 의해 지금도 움직이고 있다는 것과 우리 인간의 세포 하나, 그리고 놀라운 생명의 신비를 볼 때 창조주의 탁월한 지혜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악’의 문제를 다루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이것이 어디에서 왔으며 왜 존재하는가 하는 것이다. 나아가 선한 사람들에게 왜 악한 일들이 일어나는가 하는 문제는 인류의 역사만큼 오래된 질문이기도 한다. 가령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의해 희생 당한 600만 명의 유대인들을 생각할 때마다 이 주제는 언제나 우리에게 실존적인 관심사이며 이 세계를 이해하고 바라보는 데 가장 중요한 이슈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문제에 대해 성경은 인간이 원래 하나님 형상으로 지음 받은 고귀한 존재였지만 죄를 지어 타락하였고 따라서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하여 스스로는 도저히 구원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만물의 영장으로,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 창조된 인간 원래의 모습은 맹자의 성선설과 비슷하지요. 반면에 전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한 죄인으로서 인간은 순자의 성악설과도 유사한다. 이 두 가지는 극과 극의 대조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성경은 이 두 가지 모두를 100% 인정하고 있다. ‘천하보다 더 가치 있는 존재’인 동시에 ‘벌레만도 못한 죄인’이라는 이 두 가지 면을 올바로 이해해야 한다. 창세기 3장은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가 어떻게 타락하게 되는지 잘 설명해 준다.

성경은 또한 죄의 ‘우주적인 영향’(cosmic effect of sin)을 말한다. 즉, 인류의 대표였기에 아담과 하와의 타락은 단순히 그들만의 타락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타락을 의미했으며 인류의 타락은 동시에 그들이 다스려야 할 세계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죄는 아담과 하와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그 이후의 인간 사회, 가정, 국가, 정치 구조, 경제, 과학만능주의 등 모든 영역에서 마치 기생충이나 바이러스처럼 붙어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변질시키고 부패하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 전체가 완전히 엉망이 된 것은 아니다. 이것을 ‘보편 은총(common grace)’ 또는 ‘일반 은총(general grace)’라고 하는데 악이 지배하는 세상에도 여전히 햇빛은 모든 사람에게 비취며 창조의 선한 기본 구조는 남아 있기 때문이다. 다만 악은 이 창조의 발전 방향을 왜곡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이 ‘구조’와 ‘방향’을 올바로 구별하는 것이다. 가령 음악을 포함한 예술이나 건축 자체의 구조는 선하지만 이것을 어떤 방향으로 사용하는가에 따라 그 의미는 달라진다.

타락의 결과 인간은 바벨탑을 쌓게 된다. 바벨탑은 지금 말로 하면 최첨단 기술이 동원되어 건설된 도시로 인간이 만든 낙원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결국 이 프로젝트는 실패하고 중단된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네덜란드의 화가 피터 브루겔(Pieter Bruegel)은 자신의 그림을 통해 잘 설명하고 있다. 문제는 바벨탑이 아니라 그 탑을 건설하는 인간에게 있다. 그림 왼쪽 아래에 보면 인간이 스스로 왕이 되어 하나님의 자리에 앉자 결국 내부적인 모순이 발생하고 각자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면서 서로 소통이 되지 않고 갈등이 커져 바벨탑은 실패작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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