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인 디아스포라 선교에 관한 소고-5회

  • 05/06/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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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역소고] 황종한 선교사/ GMS, A국 선교사

III. 디아스포라와 페르시아 교회

호메이니의 혁명은 역사 속에서 가장 큰 두뇌 유출(Brain Drain)을 초래했는데, 이때 이슬람 혁명이 가져온 정치, 종교적, 불안정으로 인해 자국을 떠났다…

2. 호메이니 이후 이란인 교회와 디아스포라 선교

앞에서 유대인 디아스포라, 로마 제국의 그리스도인 디아스포라, 시리아-동방교회의 디아스포라, 아르메니아 교회 디아스포라의 페르시아 유입이 페르시아 교회의 형성과 발전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는지 고찰해 보았다. 페르시아 교회는 그 형성과 발전에 있어 디아스포라들에 빚을 지기도 했고, 동시에 그 자신이 디아스포라가 되어 중앙아시아, 인도, 중국에 이르기까지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감당하기도 하였다. 역사 속에서 디아스포라 선교를 언급함이 없이 페르시아 교회사를 재구성하기란 어렵다. 다음은 1979년 호메이니(Ruhollah Khomeini, 1902-1989)의 이슬람 혁명이 디아스포라와 이란 선교의 관점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1) 이슬람 혁명이 가져온 변화
1979년 호메이니의 이슬람 혁명은 약 2,500년 역사의 페르시아식 왕정 체제를 종식시키고, 이슬람 공화국 체제를 가져왔다. 호메이니는‘이슬람법학자통치론(Velayat-e Faqih)’을 주장했는데, 이맘의 은폐기 동안 이슬람법학자들이 대리인으로서 무슬림들을 통치할 수 있다는 것이다.46 따라서 대통령 선거와 삼권체제가 존재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이슬람 최고 지도자(Supreme Leader, 現 아야톨라 하메네이, Ayatollah Khamenei)가 최고 통수권자로서 신정 정치의 대리인 역할을 하는 셈이다.47 개혁파 성향의 하타미 대통령(Seyyed Mohammad Khatami, 1997-2005)시절 정치적 변화에 대한 국민적 기대는, 하타미 집권 이후 인권 탄압 증가라는 반작용 속에서 사그라들었다. 아흐마디네자드 대통령은(Mahmoud Ahmadinejad, 2005-2013)은 극단적 시아파 종말론과 원리주의 노선을 따랐다. 하산 루허니(Hassan Rouhani, 2013- 현재) 대통령은 오바마 미국 전 대통령과 핵협상을 통해 서방 경제제재가 해소되기를 열망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핵합의(JCPOA, 포괄적 공동행동계획) 탈퇴로 원점으로 돌아갔다. 시아파 맹주로서 중동의 패권을 잡고 시아 이슬람 혁명을 수출하려는 이란은 중동 주변국 시아 세력에게 경제, 군사적 지원을 계속하기 때문에, 주변 순니 이슬람 국가들로부터 경계를 받고 있고, 서방의 관점에서도 달갑지 않은 존재다.

호메이니의 이슬람 혁명으로 이란에서 사역하던 서양 선교사들은 모두 비자발적 철수를 해야 했다. 선교 후발주자로 나선 한인 선교사들의 사역은 1980년대 말에 소수로 시작했고, 1999년 이후 본격화되어 2000년대 중반에는 50- 60 여명이 입국하여 활동하다가 2009년 8월 이후 단계적으로 비자발적 철수를 경험하게 되었다. 이란 국내 종교적 압력과 감시가 심한 환경에서 사역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다. 신앙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되어 투옥 당하고 고난을 겪는 이란 무슬림 회심자(MBB, Muslim Background Believers)소식을 듣고, 때로는 가정 교회 모임이 발각되어 영적 공급이 어려워진 현지 MBB의 상황을 들으며 함께 안타까워하며, 금식과 기도로 이들의 고난에 함께 동참하는 사역을 감당하기도 했다. 이란은 외부적으로 복음에 대해서 매우 닫힌 지역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이란 내부에서 사역을 하면서 경험한 것은 이들이 열린 마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된 토양과 같다는 것이다. 크리스채니티투데이지(Christianity Today)는 올해로 이슬람 혁명 40주년을 맞이한 이란이 여전히 달라진 것이 없다고 했다. 이란 행정부가 외적으로 바뀌어도 이슬람 신정체제는 변함없이 기독교가 이란 사회 전반에 영향을 끼치는 것을 극도로 제한하고 핍박을 계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2018년에만도 29명의 무슬림 개종자들이 6개월에서 10년 이하의 구형을 받고 감금중이다. 그러나 공식화되지 않은 더 많은 숫자가 있을 것으로 본다.48 세계 기도 정보(Operation World, 2010)는 이란 MBB의 급격한 증가를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1979년에 무슬림에서 개종한 신자는 단지 500여 명 뿐이었는데, 현재는 급속히 증가하여 적게 잡아도 10만 명이 넘는다고 추정한다. 더 낙관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100만 명으로 보고 있다. 7세기 이후 페르시아에 있는 교회가 1979년 이후만큼 빨리 성장한 적이 없을 정도다. 최근 수년 동안 가장 많은 열매를 맺고 있다. 배교에 사형을 선고하는 나라에서 이처럼 지하 교회가 성장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이 놀랍게 역사하셨기 때문이다. 표적과 기사, 꿈과 환상이 풍부하다. 49

오픈도어 선교회에서는 2019 World Watch List에서 이란을 전 세계 박해지수 9위, 총 인구 8천 2백만 명에 그리스도인이 80만 명인 것으로 집계한다.50 어떻게 이런 놀라운 선교적 돌파가 이슬람권에서 가능할 수 있는가? 이란 현지 기독교인들은 이란 선교의 일등 공신으로 호메이니를 손꼽는다. 이슬람 혁명의 결과 이란 국민의 이슬람 유토피아에 대한 환상이 깨졌다. 이슬람 성직자들의 거짓과 부패에 환멸을 느껴 이슬람을 등지고, 진리를 찾는 구도자들이 급증했다. 서방의 경제 제재는 부정적 희생양 역할을 했는데, 극심한 경제 침체와 실업율, 우울증, 마약 중독, 미래 희망 부재는 이란 무슬림들이 이주라는 탈출구를 향하게 했다.

2) 이란인 디아스포라의 증가와 선교
하킴자데(Shirin Hakimzadeh)의 연구에 의하면 현대 이란인 디아스포라의 물결은 크게 세 시기로 분류할 수 있다.51 첫째 시기는, 이슬람 혁명 이전 시기로 1950년-1977년에는 매우 적은 수의 이란인들이 해외로 이주했다. 이들 대부분은 유학생이거나 전문가, 사업가 신분이었다. 둘째 시기는 1978년-1995년인데 호메이니의 이슬람 혁명 이후의 기간으로서 급격한 디아스포라 증가 현상을 보였다. 한 예로, 1965년에 단지 1만 5천 명 정도의 이란인들이 미국에 거주하였던 것에 비하여, 혁명 직후인 1980년에는 약 12만 명으로 증가했고, 혁명 후 11년이 되는 1990년에는 약 80만- 110만 명으로 미국에서의 이란인 이주자들이 급증한 것을 알 수 있다. 호메이니의 혁명은 역사 속에서 가장 큰 두뇌유출(Brain Drain)을 초래했는데, 이 시기에 이주자들은 이슬람 혁명이 가져온 정치, 종교적 압력과 불안정으로 인해 자국을 떠난 정치적 망명자들, 다수의 지식인, 엘리트층이었다.52
셋째 시기는 1999년 이후- 현재까지로 하타미 집권 이후에 이루어졌다. 개혁에 대한 국민들의 정치적 기대가 물거품으로 사라지면서 난민 형식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높아졌다.53

각주

46) 유달승, “이란 정치문화의 기원과 요소에 관한 연구,” 「한국중동학회논집」 19(1998), 144-145. 벨라야트(Velayat)는 통치, 보호를 의미하고, 파끼흐(Faqih)는 이슬람법학자를 의미한다.
47) https://www.parliran.ir/ (2019년 7월 10일 접속) 호메이니의 ‘이슬람법학자 통치론’은 이란 이슬람 공화국 헌법 제 5조에 잘 나타나 있는데, 헌법 제5조에 따르면 이맘(헌법에는 Vali-ye Asr, ‘시대의 주, 수호자’로 표현됨)의 부재시 정의롭고, 독실하며, 시대상을 이해하고, 용감하고, 행정능력이 있으며 문제해결의 능력이 있는 이슬람법학자인 최고 종교지도자에게 위임한다”고 규정한다. 헌법 107조는 최고지도자의 자격 요건을 말하는데, 최고 지도자의 자격요건은 마르자에 타클리드(Marja-e Taqlid, 시아 이슬람 종교 지도자)이자 혁명 지도자 이맘 호메니이 같은 라흐발(Rahbar, 정치 지도자)의 자격을 동시에 갖추어야 했다. 그러나 호메이니 사후 1989년 개정헌법에서는 최고지도자의 자격요건으로 마르자에 타클리드의 조항을 삭제하고 최고지도자가 국민들의 투표에 의해서가 아닌 이슬람법학자 전문가회의에서 선출하도록 규정했다. 당시 하메네이가 마르자에 타클리드가 아닌 가운데 최고 지도자로 선출됨으로서 야기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최고지도자의 자격요건이 수정된 것이다.
48) Jayson Casper, “40 Years Later, Iran’s Islamic Revolution Feels Threatened by House Churches”, Christianity Today (February 14, 2019) https://www.christianitytoday.com/news/2019/february/iran-christian-arrests-40th-islamic-revolution-house-church.html (2019년 7월 2일 접속)
2010년 이란의 최고 지도자 하메니이(Ali Khamenei)는 시아 이슬람 신학의 양성지 꼼(Qom)시에서 가정 교회 네트워크야말로 이슬람의 적이 이란을 위협하는 수단 가운데 하나라고 힘주어 연설하였다.
49) Jason Mandryk, Operation World – 7th edition, 『세계 기도 정보 2』 (서울: 죠이 선교회, 2011), 343. 위 통계는 2010년 기준이지만, 연구자가 이란에 머물던 2009년에 경찰 조사를 받고 나온 한 MBB는 이란 정보부가 이미 당시 가정 교회 교세를 100만 명 이상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했다.
50) David Currey, 2019 World Watch List (Santa Ana: Open Doors USA, 2019), 18.
51) Shirin Hakimzadeh, “Iran: A Vast Diaspora Abroad and Millions of Refugees at Home,” (September 1, 2006). https://www.migrationpolicy.org/article/iran-vast-diaspora-abroad-and-millions-refugees-home (2019년 7월5일 접속)
52) http://farsinet.com/pwo/diaspora.html (2019년 7월 10일 접속)
53) 맨드릭(Jason Mandryk)은 2010년 기준 이란인 디아스포라를 약 400만 명 정도로 본다. 이들 대부분 미국, 캐나다, 유럽, 터키, 걸프 국가와 같이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곳에서 지낸다. 페르시아어를 사용하 는 약 800개의 이란인 교회와 가정 모임에 약 20만 명이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Mandryk, Operation World, 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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