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인 디아스포라 선교에 관한 소고-4회

  • 06/05/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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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역소고] 황종한 선교사/ GMS, A국 선교사

III. 디아스포라와 페르시아 교회

아르메니아(Armenian) 그리스도인 디아스포라의 페르시아 유입은 디아스포라 선교학 관점에서 또 다른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1. 호메이니 이전의 페르시아 교회와 디아스포라 선교

89년 동로마 제국의 황제 제논(Flavius Zeno, 474-491)은 에데사(Edessa, 현 터키 남동부 Urfa에 있는 ‘페르시아 신학교’를 폐쇄시킨다는 칙령을 반포했다. 당시 에데사에 있던 페르시아 신학교는 동로마 제국 안에 남아 있던 네스토리우스 지지자들이 다니던 신학교였는데, 이 칙령으로 인해서 에데사 신학교의 모든 교사들이 페르시아의 니시비스(Nisibis, 현 터키 남동부의 Nusaybin)로 집단 이주하게 되었다. 에데사와 니시비스30는 아람어를 사용하는 시리아 동방교회31의 중심지로서 페르시아 지역에 그리스도교를 전파하는 중요한 핵심 역할을 했던 도시들인데, 에데사 신학교의 폐쇄의 결과로 니시비스 신학교가 페르시아 교회의 신학 메카가 되었고 니시비스 신학교를 통하여 네스토리아파 신학이 페르시아 교회로 퍼지게 되었다.32 498년 페르시아 총대주교 바바이(Babai, 497-502)는 셀류키아-크테시폰에서 사산 페르시아 영토 내의 주교들을 소집하여 공의회를 개최하고 네스토리우스파 그리스도교의 양성론을 페르시아 교회의 신학적 입장으로 채택한다. 이를 통해 페르시아 그리스도교는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안디옥, 알렉산드리아 등 다른 지역의 그리스도교와 결별한 셈이다. 33 바바이는 서방 그리스도교와 달리 사제 독신제를 폐지하고 결혼과 재혼을 허용하며, 셀류키아-크테시폰 주교가 동방 교회에 대한 수위권을 갖는 총대주교좌34가 됨을 천명함으로써, 페르시아 교회는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되었다.35 6세기 중엽에는 니시비스 신학교에서 공부하는 신학생들이 1천명이나 되었고, 시리아어(Aramaic) 기독교 문헌들을 페르시아어로 번역하는 작업들이 있었다.36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의 영토 안에서 410년에는 44명의 주교가 활동했고, 650년에는 106명의 주교가 사역할 정도로 성장하게 되었는데, 벅(C. Buck)은 페르시아 교회의 성장 원인을 토착적 페르시아화의 노력으로 보았다.37 이에 반하여 노성기는 사산조 페르시아 교회가 심한 박해를 받으면서도 성장하며, 선교적 교회로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은 페르시아에 유입된 디아스포라 시리아-동방교회가 가진 뛰어난 신학적 우수성과 선교적 열정이 접목된 결과로 파악한다. 이는 시리아-동방교회 디아스포라가 페르시아 교회에 유입, 융합됨으로써 얻어진 결과로 볼 수 있다.38

4) 페르시아 교회 디아스포라의 활동
페르시아 그리스도교는 이렇게 디아스포라의 유입을 통해서 형성과 성장에 많은 자양분을 얻기도 했지만, 사산 제국 국교인 조로아스터교의 박해시기와 이슬람 통치기에 디아스포라가 되어서 중앙아시아와 인도와 중국 등지에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을 감당하기도 했다. 이들 페르시아 그리스도인 디아스포라는 박해를 피해 실크로드를 탈출 통로로 삼아 동진했다. 김상근은 실크로드 그리스도교의 전파자로서 시리아-페르시아계 사제, 선교사들과 소그드 상인들을 언급한다. 650년 소그디아나(Sogdiana)의 중심이었던 사마르칸트(Samarkant)에 시리아-페르시아 교회의 대주교좌가 설치되어 있었고, 영지주의와 마니교의 영향을 받았던 소그드39 상인들이 시리아-페르시아계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다음에 실크로드를 오가면서 문화와 그리스도교를 전파하는 큰 역할을 감당했다고 보았다.40

소그드 상인들은 무역과 함께 복음을 전하는 BAM(Business As Mission)선교를 이미 수행하고 있었다. 이렇게 박해를 피해 동진한 실크로드 그리스도교 디아스포라는 오늘날 디아스포라 선교의 좋은 모델이 된다고 볼 수 있다.

페르시아 교회는 7세기 이슬람 통치시기에 성장과 약화를 경험하는데, 당시 주교가 100여 명에서 200여 명으로 두 배 성장한 것은 페르시아의 영토 밖의 중앙아시아, 인도, 중국 선교를 통한 것이었다. 페르시아 영토 내에서는 이슬람의 개종 금지, 기독교인 세금 부과, 교회 건물 파괴, 무덤 훼손, 차별 복장 착용 등으로 인해서 페르시아 교회는 약화를 경험했다.41 13세기 몽고 침략과 뒤를 이은 티무르의 침략으로 인해서 페르시아 교회의 존재는 멸절 위기에 처하였다.42 젠킨스(Philip Jenkins)는 이러한 페르시아 교회의 반멸절 상태와 쇠락 원인이 교리적 타협과 상황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극도의 침탈과 파괴, 살육으로 말미암은 것으로 본다.43 이들은 오늘날 이란 북서부 우르미예를 중심으로 세력이 약화되어 존속한다.

5) 아르메니아 그리스도인 디아스포라의 유입
아르메니아44(Armenian) 그리스도인 디아스포라의 페르시아 유입은 디아스포라 선교학 관점에서 또 다른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페르시아 사파비조(Safavid Dynasty, 1501-1736)의 압바스 왕(Abbas, 1588-1629)은 아르메니아 영토에서 오스만 제국과 전쟁 후, 1604년 아르메니아인 30만 명을 페르시아로 이주시켰다. 아르메니아인들은 페르시아 영내 타브리즈(Tabriz), 가즈빈(Qazvin), 가장 많게는 에스파한(Esfahan)으로 이주하면서 상업적 수완과 충성심, 신실한 크리스천으로 인정받았다.45 이들은 페르시아에 경제적 이득과 대서방 외교를 위한 중요한 다리 역할을 했고 페르시아 왕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세계 제1차 대전 당시 터키에 거주하던 아르메니안들 150만 명 이상이 대량 학살을 당하면서 일부는 페르시아에 피난처를 찾았다. 아르메니안 디아스포라들이 페르시아의 도시들에 교회들을 세움으로, 페르시아 무슬림들이 복음에 접촉할 수 있었다. 이들의 친절함과 온유함은 페르시아 무슬림들로부터 긍정적 평가를 받았다.

아르메니아인들은 페르시아인 이라는 자기정체성을 가지는데 이들의 국가에 대한 충성심은 기독교인이면서 동시에 페르시아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페르시아 무슬림들에게 보여주었다. 페르시아 영토 내의 아르메니아인 디아스포라의 존재는 근, 현대 페르시아 교회사에서 복음 전파와 확장의 마중물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각주

30) 에데사는 초대교회의 중심지였던 시리아 안디옥(현 터키 안타키야)에서 북동쪽으로 약 340 km 떨어진 곳으로 구약의 하란 지역이다. 사도 도마의 제자인 아다이(Addai,Thaddeus)에 의해 복음이 전해져서 아시아 최초로 기독교 국가가 된 오스로에네 왕국(Osrhoene)의 수도가 에데사였다. 김상근은 에데사 그리스도교가 영지주의와 금욕주의의 전통을 따른다고 본다. (김상근, “실크로드 그리스도교를 찾아서”, 42.) 니시비스는 에데사에서 동쪽으로 220km 떨어진 거리에 위치한다. B.C. 3세기에서 5세기 기간에 추방된 유대인 공동체가 있었던 중요한 도시들 중의 하나로, 추방 생활 중의 유대인들이 ‘바벨론 탈무드’를 완성한 곳이기도 하다. Sunquist, Exploration in Asian Christianity, 392.

31) 노성기는 시리아-동방교회를 네스토리우스를 지지하는 교회로 분류한다. 여기서 말하는 시리아는 현대 적 국가 개념으로 사용된 것이 아님을 밝힌다. 노성기,“페르시아에 정착한 시리아-동방 교회의 역사 (485-651)”, Catholic Theology and Thought, (2008): 174. 썬퀴스트(Scott W. Sunquist)는 431년 에베소 공의회에서 이단사된 네스토리우스 지지자들로 이루어진 디아스포라가 동부 시리아 교회의 주류가 되었고, 451년 칼케돈 공의회 결과 정죄된 단성론(Monophysite)주의자들이 서부 시리아 교회의 주류를 이루었는데 콥틱 그리스도교, 에티오피아 그리스도교도들이 여기에 포함된다고 언급한다. Sunquist, Exploration in Asian Christianity, 81.

32) Moffett, Christianity in Asia Vol 1, 327-333. 니시비스 신학교는 영성교육과 성경연구가 교과목의 핵심이었고,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루스(Theodoros of Mopsuestia, 350-428)가 성경을 주석했던 성경에 대한 문자적, 역사적 해석이 중요한 모델이 되었다. 신학 외에도 역사, 수사학, 자연과학 등과 같은 세속학문도 가르쳤지만, 니시비스 신학교는 선교학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강조하였다는 특성이 있다.

33) 김상근, “실크로드 그리스도교를 찾아서”, 51.

34) 전통적으로 총대주교좌는 로마, 콘스탄티노플, 안디옥, 알렉산드리아, 예루살렘이었다. 셀류키아-크테시폰을 페르시아 교회의 총대주교좌로 삼는다는 것은 새로운 독립을 의미했다.

35) 노성기는 498년에 페르시아 교회가 시리아-동방 교회가 되었다고 논증한다. 노성기, “페르시아에 정착한 시리아-동방 교회의 역사 (485-651)”, 172-174.

36) Moffett, Christianity in Asia Vol 1, 331.

37) Buck, “The Universality of the the Church of the East: How Persian was Persia Christianity”, 55. 중국 서부 투르케스탄에서 5세기 추정 페르시아어 시편이 발견되었고, 다른 곳에서도 시리아어(Aramaic Language)가 아닌 페르시아어(중세 페르시아어와 중세 페르시아어 동부 방언인 소그드어)로 된 네스토리안 문서들이 발견되었다. 이는 아시아 동방교회의 공식 언어가 시리아어(아람어)였지만, 페르시아 개종자 중심의 페르시아 교회는 당시 페르시아어로 예전을 드렸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페르시아 교회의 성장을 위해 페르시아어 사용은 필수적이다.

38) 노성기, “페르시아에 정착한 시리아-동방 교회의 역사 (485-651)”, 186-188.

39) 소그드인들은 페르시아계 민족이며, 중세 페르시아어 동부 방언을 사용하던 자들이었다.

40) 김상근, “실크로드 그리스도교를 찾아서”, 49.

41) Thomas, By the Power of the Spirit : Stories of Iranian Christians, 29.

42) Shawqi Talia, “From Edessa to Urmia”, Bulletin of the Royal Institute for Inter-Faith Studies 7/2 (Autumn/Winter 2005), 50.

43) John Philip Jenkins, The Lost History of Christianity: The Thousand-Year Golden Age of the Church in the Middle East, Africa, and Asia–and How It Died (NY: Harper-Collins Publishers, 2008), 25-30.

44) 아르메니아는 A.D. 301년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하였는데, 이것은 로마의 기독교 공인에 앞서는 것이다.

45) Thomas, By the Power of the Spirit : Stories of Iranian Christians, 4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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