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인 디아스포라 선교에 관한 소고-3회

  • 06/05/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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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역소고] 황종한 선교사/ GMS, A국 선교사

III. 디아스포라와 페르시아18교회

초대 교회 형성을 다루는 사도행전 2장은 오순절 날 사도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고 성령 받은 각 지역 유대인 디아스포라와 이방인 경외자들을 언급하고 있다. 이들은 오순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에 찾아온 자들인데, 가장 먼저 언급된 이들은 바대(Partians, 이란 북동부), 메대(Medes, 이란 북서부), 엘람(Elamites, 이란 남서부)으로 오늘날 이란 영토에 속한 지역들로부터 왔다.

1. 호메이니 이전의 페르시아 교회와 디아스포라 선교

먼저 1979년 호메이니(Ruhollah Khomeini) 이슬람 혁명 이전의 페르시아 교회와 디아스포라 사이의 상관성을 살펴보자.

1)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유입
페르시아 교회는 그 출발점부터 구약 시대 유대인 디아스포라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신바빌로니아에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 디아스포라는 신바빌로니아를 제패한 페르시아 제국에 거주하였다. 오늘날 이란 중부 하메단(Hamedan)에 에스더와 모르드개의 회당과 무덤, 투이셀칸(Tuyserkan)에는 하박국 선지자의 묘, 이란 남부 수사(Susa)에는 다니엘의 무덤이 있다. 수산 궁에서는 느헤미야가 활동을 했고, 포로로 끌려온 에스겔은 그발 강가에서 환상을 보았다. 고레스 왕(Cyrus II, B.C.600-530)의 포로 귀환령 이후에도 다수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 땅으로 귀국하지 않고 남았는데. 페르시아의 문화 및 종교와 상호 영향을 주고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페르시아와 연관성을 가질 수 있는데, 이란의 북서부 우르미예(Urmiye) 지역에는 동방박사 기념 교회가 있다.19

초대 교회 형성을 다루는 사도행전 2장은 오순절 날 사도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고 성령 받은 각 지역 유대인 디아스포라와 이방인 경외자들을 언급하고 있다. 이들은 오순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에 찾아온 자들인데, 가장 먼저 언급된 이들은 바대(Partians, 이란 북동부), 메대(Medes, 이란 북서부), 엘람(Elamites, 이란 남서부)으로 오늘날 이란 영토에 속한 지역들로부터 왔다. 오순절 준수를 위한 예루살렘 순례 길에서 사도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던 이들 페르시아 주재 디아스포라 유대인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페르시아인들의 귀국 후에 최초의 페르시아 교회가 형성되었을 것이다.

2) 로마제국 그리스도인 디아스포라의 유입
페르시아 파르티아조(Parthian Dynasty, B.C.238-A.D.226) 시기는 종교관용 정책을 펼쳤는데, 로마 제국의 기독교 박해 기간에 로마 제국 그리스도인 디아스포라의 피난처가 되었다.20

파르티아조 영토에서 에데사(Edessa)로 망명한 귀족가문의 아들로 태어난 발다이산(Bardaisan, 154-222)은 주후 196년 경 길란(Gilan,카스피해 남부 이란 해안 지역)과 박트리아(Bactria,오늘날 이란동부와 아프가니스탄 서부)지역 기독교 자매들이 외지인에 대하여 행실이 정숙함을 언급했다.21

주후 190년부터 250년 사이에 기독교인들의 숫자가 급격하게 증가하였고, 많은 교회가 세워져 235년에는 20명 이상의 주교와 18개 이상의 교구가 존재했다.22

페르시아 사산조(Sasanian Dynasty, A.D. 226-651)는 조로아스터교가 국교화 되면서 기독교에 대한 박해와 관용이 반복되었다. 당시 로마 제국과 경쟁 관계 속에 있었던 페르시아는 여러 차례의 전쟁을 통해 로마 제국의 그리스도인 디아스포라를 전쟁 포로로 잡아 왔는데, 이들 디아스포라들은 페르시아 영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셔푸르 1세(Shapur I, 242-270)는 로마와의 전쟁 후 안디옥의 주교 데메트리우스(Demetrius)를 비롯한 교회 성직자들, 그리스도인 포로들을 페르시아 영내로 이주시키고(A.D. 256-260) 이란 남서부에 젼디셔풀(Gondishapur)이라는 도시를 건설케 했는데, 젼디셔풀은 디아스포라 그리스도인에 의해 세워진 의학 전문 센터요 교육의 중심지로서 명망이 높았다.23

셔푸르 2세(Shapur II, 309-379) 통치기에 기독교 박해는 40년간 지속되었는데, 3만 5천명이 순교를 당하기도 했다.24 10만 명의 디아스포라 그리스도인들이 페르시아의 대 로마 전쟁 포로가 되어 페르시아의 에스파한(Esfahan)과 수사(Susa)로 이주했고, 이들을 통해 타티안(Tatianus)의 디아테사론(Diatessaron) 대신 서방의 4복음서가 전해지게 되었다고 부부스(Voobus)는 논한다.25 야즈드게르드 2세(Yazdgerd II, 438-457) 통치 시기에는 기독교인 15만 3천명을 학살하는26 큰 박해도 있었지만, 역사학자 벅(Christopher Buck)에 의하면 사산조 페르시아의 25개 도 가운데 최소 18개 도가 복음화 되었으며, 수도 셀류키아-크테시폰(Selucia-Ctesiphon, 바그다드)의 총대주교 관할 하에 5명의 대주교, 38명의 주교(감독)가 존재했고, 오늘날 이란의 남부 파르스(Fars)와 남동부 케르만(Kerman) 지역에 이미 교회들이 세워져서 복음전파가 활발히 이루어지는 등 페르시아 교회는 성장하였다.27

3) 시리아-동방교회 디아스포라의 유입
5세기에 기독론 논쟁에서 이단28으로 몰린 네스토리아(Nestorius, 386-451)파 그리스도교29 디아스포라의 페르시아 유입은 페르시아 교회를 신학적으로 강화시켰으며, 선교적 교회로 변모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각주

18 페르시아(Persia)의 역사는 고대 소그드 지역 인근 중앙아시아를 원 근거지로 삼는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아리안(Aryan)족이 오늘날의 이란 고원에 이동하여 정착함으로 시작이 된다. 이란 고원의 서부에 먼저 정착한 이들을 메대인(Medes)이라고 불렀으며, 이와는 달리 이란 고원의 중남부인 파르스(Pars, Fars)지역에 자리잡은 고레스(Cyrus II, B.C.600-530)가 메대와 신바빌로니아 제국을 평정하고 광활한 영토를 차지하게 되면서 대외로 널리 알려진 이름이 페르시아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페르시스(Persis)’라고 하였고, 라틴어로는 ‘페르시아’로 불리웠으며, 한자 문화권에서는 ‘파사(波斯)’라고 칭하였다. 1935년 레자 파흘라비(Reza Pahlavi) 국왕에 의해서 페르시아라는 명칭은 아리안족의 땅이라는 의미의 ‘이란’으로 국호가 개명되었다. 그러나 페르시아라는 말의 생명력이 워낙 유구하며, 페르시아를 이란으로 대체할 경우 오히려 이란 외부에서 이란과 페르시아가 서로 다른 곳으로 오해할 위험성이 적지 않다는 논란이 일었다. 이에 이란대백과사전(Encyclopædia Iranica) 주편집자인 야샤터(Ehsan Yashater)는 1959년 위원회를 구성하고 논의를 거쳐 페르시아와 이란을 교차적으로 사용하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페르시아가 제국으로서의 문화적, 역사적, 지역적 광범위한 개념인 것에 비하여, 이란은 축소화된 현대의 국가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본 연구에서는 페르시아와 이란이 교차적으로 사용되었음을 밝힌다. 정상률,『2011년 중동지역 기초연구: 이란』(서울: 명지대학교 중동문제연구소, 2011), 5.

19 마태복음 2장에 나오는 박사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magos인데, 바빌로니아와 페르시아의 기원을 가진다. 이들은 신바빌로니아 제국 시대 왕의 후계자들을 육성하던 사제 계급의 현자로서 당대의 의술, 점성술, 마술, 해몽 등 여러 학문에 정통한 자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테헤란 대학교의 자파리(Mahmud Zafary)교수는 페르시아 고대문명을 강의하면서 헬라어 magos가 페르시아 조로아스터교 사제를 지칭하는 페르시아어 mog(복수형은 mogan)에서 파생한 단어라고 했다. 더 많은 자료 연구가 필요하지만, 마태복음 2장에 나오는 박사들은 포로기 이후 전해져 내려오는 다니엘의 메시아 예언 전승을 염두에 두었던 조로아스터교 사제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Mahmud Zafary Dahqy, “Tamadon va Farhange Bastane Iran(이란 고대 문명과 문화 강의안)”, Tehran: Tehran University, March 2009.

20 J. P. Asmussen, “Christians in Iran”, in The Cambridge History of Iran Vol 3(2) : The Selucid, Parthian and Sasanian Periods, ed. Ehsan Yarshater,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3), 928.

21 Kenneth J. Thomas, By the Power of the Spirit : Stories of Iranian Christians (Association of Iranian Presbyterian Churches and Fellowships in North America, 2015), 13 ; Ian Gilman & Hans-Joachim Klimkeit, Christians in Asia before 1500 (NY: Routledge, 1999), 208-209.

22 Ian Gilman & Hans-Joachim Klimkeit, Christians in Asia before 1500, 109.

23 Gilman, Christians in Asia before 1500, 110.

24 Christopher Buck, “The Universality of the the Church of the East: How Persian was Persia Christianity”, Journal of the Assyrian Academic Society X(1)(1996), 57.

25 Samuel H. Moffett, Christianity in Asia Vol 1, 김인수 역, 『아시아 기독 교회사 제1권』 (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1996), 245.

26 Moffett, Christianity in Asia Vol 1, 268.

27 Buck, “The Universality of the Church of the East: How Persian was Persia Christianity”, 62-69.

28 안디옥 학파 출신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네스토리우스가 이단으로 지목된 결정적인 동기는 성모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Theotokos)’로 부르던 서방교회의 전통을 부정하고, 대신 ‘그리스도의 어머니(Christotokos)’로 호칭할 것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씨릴리우스(Cyril)는 그리스도의 본성을 이해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신성’을 더 강조하는 단성론적(Monophysite) 경향이 강했는데, 네스토리우스는 성모를 ‘그리스도의 어머니’로 부르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신성과 양성을 동시에 갖추었다는 양성론에 더 부합한다고 보았다. 뿐만 아니라, 당시 레반트(Levant)와 소아시아 지역에 여신 숭배 전통이 강하여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로 부르는 것 자체에 이교적 요소가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스토리우스의 사상에서 확인하게 되는 것은 신인(God-Man)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을 지닌 인간’ 개념이며, 나사렛 예수의 인격이 신적 로고스가 거하실 때 쓰시는 도구 혹은 성전에 지나지 않는 개념이다. 두 본성이 하나의 위격적 결합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두 본성은 서로 외적이고 기계적인 관계를 지니며, 이 관계 안에서 어떤 유형의 속성간의 교류(communicatio idiomatum)도 없게 되는 것이다. 그는 결국 431년 에베소 제3차 세계 공의회를 통해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그러나 451년 칼케톤 제 4차 세계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선언함으로써 기독론 논쟁을 종결지었다. “그는 하나님의 어머니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낳음을 입으셨다. 그는 한 분이요, 동일한 그리스도, 아들, 주, 독생자이신 그 분은 혼합됨도 없고(inconfuse), 변화됨도 없으며(immutabiliter), 단절도 없고(indivise) 분리도 없는(inseparabiliter) 두 본성을 (in duabus naturis) 가지고 계신다고 알려져 있다. 두 본성들의 차이는 본성들의 결합으로 인해서 결코 제거되지 않으며, 오히려 각각의 속성이 보존되며, 두 본성이 하나의 인격(prosopon)과 하나의 위격(hypostasis) 안에서 동시에 발생한다. 우리는 두 인격으로 구분되고 분리된 아들을 고백하지 않고, 한 분이시며 동일하신 독생자시고 하나님이시며 말씀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한다.” Philip Schaff,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vol 3, 이길상 역, 『교회사전집 3: 니케아 시대와 이후의 기독교』(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4), 622-649.

29 지금까지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에 전해진 기독교는 경교(景敎) 또는 네스토리아파 그리스도교(Nestorian Christianity)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김상근 교수는 이 표현이 학문적으로 적절하지 않다고 본다.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에 전래된 그리스도교의 정체로서‘대진경교유행중국비’에 나타난 그리스도교 교리는 431년 에베소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된 네스토리우스파 교리와 현저한 차이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김호동의‘동방 그리스도교(Eastern Christianity)’란 표현은 너무 포괄적이며 ‘동방 정교회(Eastern Orthodox Church)’나 ‘페르시아 동방교회(The Persian Church of the East, 498년 설립)’와 혼동될 가능성이 있고, 이장식이 사용한‘아시아 고대 그리스도교’라는 표현은 ‘고대(ancient)’라는 시대 구분이 모호하기 때문에 적절치 않다고 본다. 그래서 김상근은 ‘실크로드 그리스도교(Silk Road Christianity)’로 명명할 것을 제안한다. 그의 관점에서 중국에 전해진 기독교는 시리아-페르시아의 그리스도교가 실크로드 각 지역의 다양한 종교와 문화와 조우하여 생성된 실크로드 그리스도교이다. 김상근, “실크로드 그리스도교를 찾아서”,「선교신학」27 (2011): 3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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