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라는 시간의 좌표

  • 04/03/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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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크시론 219호]  이창배 발행인

2020-03월호 사설

이 시대는 다른가. 아니다. 결단코 다르지 않다. 이 시대 십자가 앞으로 나온 한 사람, 그 한 사람, 모두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 요한복음 3장16절, 그 약속을 믿는다. 한 사람의 요나를 보내어, 열방과 나라와 백성을 구원해내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이, 당신의 독생자를 아끼지 아니하고 내주신 그 마음이 저만치 비구름을 열고 비쳐오는 찬란한 햇빛처럼 감싸주신다.

아침 안개가 서려있는 숲길을 지나는 동안 보았던 빽빽한 나무들. 그 셀 수 없이 많은, 여기저기 엉키고 설키 듯 뻗어져나간 나뭇가지도 나름대로 질서를 가졌다. 그 끝, 가느다랗게 나뭇가지의 끝을 따라 하늘과 맞닿는 자리를 이어가면서 몽글 몽글하게 제 각각의 모양새를 펼쳐대는 나무의 실루엣이 그렇게 아름다운지 몰랐다.
비슷한 듯, 비슷한 듯, 하면서 형형 각색의 모양들을 이룸이 어찌 이리 아름다울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되었다. 나무는 봄철의 파릇함, 여름철의 푸름, 가을철의 누름이 아름답다지만, 한 겨울철 잎 새 없는 가지의 끝, 그 가녀린 가지 끝으로 지나는 바람결에 부드럽게 흔들리며 잔상으로 남겨지는 실루엣만으로도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이제야 맛보다니! 새삼, 두말할 나위도 없이 경이로운 창조주의 솜씨 앞에 찬양이 절로 나지 않을 수 없었다.
파란 하늘에 햇빛이 투명한 밝은 날에 이 순간을 맛볼 수 있다면 아마 또 다른 감동이 생길 수 있으려니 싶었다. 하지만 이런 영감이 번뜩 떠오르는 일은 사실 다시 되돌아 올 수 없는 찰나적 순간일 뿐 가슴 벅차게 다가온 감동은 곧, 사라지고 말 안개와 같다. 다시 반복될 수 없는 강렬한 느낌을 순간이나마 맞이했다는 사실이 행복함으로 바꿔지며 온통 신경과 세포로 퍼져나갔다.
지난 밤 쉴 새 없이 창문을 두드리며, 단잠을 설치게 하던 비, 밤새도록 내린 비로 촉촉이 젖은 숲길을 지나는 동안 이내 차창에 뿌려지는 빗방울이 조금씩 굵어진다. 이 차가운 겨울비 속으로 생명의 기운이 아지랑이 피어나듯 잔잔한 물결 되어 숲속으로 번져간다. 숲길을 빠져나와 작은 마을 어귀에 서있는 한 교회 근처로 다가서다 보니 가로수 주위 잔디밭에는 수없이 불쑥 불쑥 솟아나온 크로쿠스(krokus) 꽃 봉우리들로 곧, 임박한 봄의 향연을 펼쳐진다.
아~ 이 겨울비 속에 그래도 봄은 오누나. 독일에서 봄의 전령 꽃이라고 불리는 크로쿠스의 옅은 보라색 꽃대들이 땅을 뚫고 올라 온 모습이 반갑다. 그런데 이는 또 뭔가. 철없이 먼저 만개해버린 꽃, 그도 한 두 개가 아니다. 때를 잃어버린 조급함일지, 무감각함일지 몰라도, 어차피 피운 꽃인데 이 비 오는 차가운 날씨에 버티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를 올린다.

드디어 터질 것이 터지고 마는가?

세상은 이다지 3월을 향해 가쁘게 다가서는데, 세상의 소식은 참 어둡기 짝이 없다. 조국 대한민국에서 들려지는 암울한 소식은 더욱 마음을 조이게 한다. 화창한 봄소식을 기다리는 모두의 마음에 도리어 찬 기운이 엄습했다.
그래도 우리만은 아니길 바랐던 마음인데. 드디어 터질 것이 터지고 마는가. 아직 우리의 시련이 끝나지 아니한 것인지 기댈 곳조차 없어 하늘을 올려다본다. 오, 주여!
흐릿한 하늘을 올려다보니 방울방울 흩뿌리어 날리는 빗방울이 어느덧 얼굴을 적신다. 여린 나뭇가지를 타고 흐르던 물방울이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툭 떨어져 내린다. 수도 셀 수 없을 만큼 할퀴고 지나간 겨울 칼바람의 상처도, 눈 덮이고, 서리로 덮이고, 수도 없이 얼렸다 녹였다 반복하기를 그 몇 번째던가. 그 모진 시련 속에도 나무는 견디어내며, 새싹을 틔울 준비를 마쳤다. 참 위대하다.
불현듯 악의 도성 니느웨를 심판하시기를 정하시고도 끝내 그 결정적 시간을 늦추시는 하나님과 속히 결단을 시행하시기를 바라서 멀리로 도망을 친 요나의 몸부림이 고통으로 다가선다.
그런 요나, 니느웨 백성의 구원을 원치 않아 끝까지 몽니를 부리는 요나의 모습은 누구의 자화상인가? 내 마음이 가는 곳으로만 복음을 흘려보내고픈 옹졸한 요나가 어찌 하나뿐일까? 그런 요나를 참으며, 포기하지 않고 설득해 사명자로 세우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요나서 4:11).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백성과 하물며 가축들까지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이 우리에겐 소망의 근거이다. 그렇지 않은가? 내 마음과 생각을 붙잡고, 내 주의와 사고방식대로의 원칙을 고집하던 요나의 깨뜨려짐이 그 답이다.
지금 이 시국이 꽁꽁 얼어붙은 한 겨울철로 되돌아가는 것 같아보여도 결국엔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정의의 틀이 무너졌고, 공의와 정의, 법과 원칙이 무너졌다고 여겼기에 자포자기하고 깊숙이 배의 밑창으로 숨어들어 침묵한다고 해서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일…

그렇다. 지금, 누군가가 내가 바라던 그 어떤 무엇을 해주리라 믿는가? 지금의 사태가 곧, 망하기 직전의 혼란이 공포로 엄습해오던 큰 도성 니느웨와 무엇이 다를까? 이 거대한 위기가 눈앞에 엄습해오는데, 여전히 제 욕심만 차리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들을 향해, “사십일이 지나면~” 요나처럼 제 맘에 들지 않아 투덜대며 전해도 된다. 할 수 없이 억지로 발품을 팔며 전하고 멀찍이 떨어져 어찌될까를 지켜보아도 된다. 지금 바로 그런 시점이 온 것이다. 심판과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니 분명 그 분께서 행하실 줄을 믿고 나가야 할 때이다. 교회가 더는 침묵하고 있으면 안 된다.
보자. 누가 짐작인들 했던가? 교회가 자의적이던지, 타의적이던지, 어쩔 수 없이 문을 닫고 주일예배를 폐하는 사태로 대형교회들이 교회 문을 닫았다. 크고 작은 예배, 모임의 중단소식이 잇따른다. 충격적이다. 문제덩어리 이단 신천지 집단의 역할이 지대했다지만,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초유의 일이 생겼다. 중국에서 시작된 우한폐렴 사태가 그 발화점이다. 앞으로도 어떤 변화가, 어떤 변수가 새로이 등장하게 될지 알 수 없다. 다만 성경이 말씀하기로, 니느웨는 회개로 돌이켰다. 왕이 굵은 베옷을 입고, 재 위에 앉아 눈물을 흘렸다. 그 백성이 하나님께로 돌아섰다. 그게 살 길이다.
이 시대는 다른가. 아니다. 결단코 다르지 않다. 이 시대 십자가 앞으로 나온 한 사람, 그 한 사람, 모두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 요한복음 3장16절, 그 약속을 믿는다. 한 사람의 요나를 보내어, 열방과 나라와 백성을 구원해내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이, 당신의 독생자를 아끼지 아니하고 내주신 그 마음이 저만치 비구름을 열고 비쳐오는 찬란한 햇빛처럼 감싸주신다.
우리도 그렇게 가야한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길을, 한 번도 지나가 보지 못했던 새 길을 가는 방법은 복음을 듣고, 돌이켜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는 회개의 굵은 베옷을 입어야 한다. 교만한 마음을 낮추고 재 위에 꿇어앉아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 여기로부터 새롭게 시작하는 길 뿐이다.

이달의 말씀 | 요나서 4: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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