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되새기는 “너도 이와 같이 하라”

  • 08/02/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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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크시론 218호]  이창배 발행인

2020-02월호 사설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오늘 이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가 진정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다시 곰곰이 마음에 새겨야 할 이유가 이것이다. 예수를 닮아야 한다. 강탈당한 자를 불쌍히 여긴 사마리아 사람, 그 영적 진리를 발견해야 한다. 그분이 나의 이웃이고, 내가 내 몸처럼 사랑해야할 대상이고, 내가 그분처럼 되어야 한다. 내 이웃을 향한 진정한 긍휼을 이념의 좌우, 신분의 고저, 빈부의 귀천을 뛰어넘어 절망에 빠진 사람을 불쌍히 여겨야 한다.

설날을 보냈다. 중국 우한발 코로나 바이러스 소식에 온통 세상이 뒤숭숭하다. 슈퍼에만 가도 행여 기침이라도 나올라치면 언뜻 주변을 살필 수밖에 없다. 왠지 아시아 특히 동북아시아를 대표하는 한국, 중국, 일본 사람들의 외모가 엇비슷하다보니 현지인들로부터 부담스러워 하는 느낌을 받는다. 폐렴을 일으키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뉴스를 탈 때마다, 전염병을 예방하기 위한 지침을 받아들여야 할 때 마다 늘어나는 중국인 포비아 현상은 중국인을 넘어서 아시아인들에게까지 급속도로 확산되는 것이나 아닐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미 세계적인 재앙이 될 것이란 불길한 예측들이 나온다. 아직 이 바이러스에 대한 백신이 개발되었다는 소식이 없다. 일부에선 백신개발에 소요될 시간이 일 년 정도 걸릴 것이란 예측도 나온다. 당장 두려움과 공포에 질린 사람들, 감염 확진 판정을 받은 환자들로 아비규환을 이루고 있는 우한 현지 병원의 상황을 유투브로 접하고보니 겹겹이 암울함이 가중된다. 더욱이 인구 천백만 명이라는 대도시 우한시가 봉쇄에 들어가게 됨으로 인해서 오도 가도 못한 채 고립되어 불안의 나날을 보내는 사람들의 형편을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다. 그들은 어쩌란 말인가. 고르지 못한 일상의 일기처럼 우리내 마음에도 음울한 기운이 퍼져만 간다.
그런가하면 이런 거대한 공포에 직면해 있는 우한시를 비롯한 봉쇄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자국민을 구출하려는 국제적인 움직임 가운데 우리나라 정부도 전세기를 보냈다. 하지만 이들을 비행기에 태우고 돌아와 특정지역서 일정기간 격리해 경과를 지켜보겠다는 정부발표가 나오자마자 해당지역의 주민들이 결사반대하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로 씁쓰레함을 금할 수 없다. 개인 이기주의와 지역 이기주의가 어느 정도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이다. 타인에 대한 이타심과 배려가 사라진 사회상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다. 고통당한 이웃에 대한 적극적 도움은 고사하고서라도 재난에 휘말린 이웃에 대한 긍휼의 마음조차도 사라진 것인지, 어쩌다 우리사회가 이 지경까지 왔는지 그저 안타깝기만 하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

오늘따라 매우 익숙한 성경의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누가복음 10장 29절에서 시작된다.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모세의 율법을 잘 알고 있는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고자해 끝에 질문한 것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이다. 이 질문에 대해서 주신 답이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이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에서 강탈을 당한 자, 매 맞고 거반 죽어가는 자를 보고도 율법에 저촉될까 두려워 당연하게 그냥 지나쳐간 제사장, 그리고 역시 못 본체 하고 지나쳐버린 종교인인 레위인, 그런데 가던 길을 멈추고 강도 만난 자를 불쌍히 여겨서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부어 씻어주고, 자신의 짐승에 태워 여관에 데려가 치료까지 부탁해준 사마리아 사람이 등장인물이다. 36절에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라고 물었다. 그러자 율법사는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답했고, 그에게 주님은 “너도 가서 그렇게 하라”며 37절에 이 이야기의 끝을 맺으셨다.
여기에 극적 반전이 숨겨진 모자이크가 보인다. 율법사에게는 “그 누가 내 이웃인가?” 가 관건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놀랍게도 주님은 강탈당한 자와 율법사를 동일시했다. 곧, 율법사야말로 강도 만난 자라는 것이다. 그가 무엇을 강탈당했는가? 그리고 거반 죽을 정도로 맞아야 했는가? 어안이 벙벙해진 순간이었다.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는지에 대해서는 해박한 지식을 가졌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그토록 갈망하는 영생을 강탈당했음을 깨닫지 못한 율법사이다. 더 나아가 죽어가는 자신을 구원해 줄 사람, 그 이웃이 누구던가? 제사장? 아니다. 가문 대대로 하나님의 성전을 섬기는 레위인? 아니다. 그런데 평소 개나 돼지만도 못한 인간으로 취급해 아예 상종도 하지 않으려 하던 사마리아 사람이 이웃이란다. 그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이다.

사랑할 내 이웃은 누구인가?

이 말씀이 적용된 사마리아 사람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었다. 요한복음 8장48절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며 도전했다.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가리켜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경멸해마지 않았던 그 비하하는 목소리가 들려진다. 자기 자신을 돌아보지 못한 눈뜬 소경과 같던 유대인들, 율법을 생명처럼 지키는 것을 스스로 의롭다 여기던 사람들에 대한 통렬한 꾸짖음이었다. 왜냐하면 율법사로 대표되는 유대인들, 그들 자신이야말로 강도 즉 마귀를 만나 빼앗긴 것이 영원한 생명인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주님은 사마리아인이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부어 소독해주고, 싸매어 주듯이 깊게 입은 상처를 어루만지며 치료해 주시는 분이시고, 치료와 회복에 필요한 모든 수고를 감당했듯이 십자가에서 대속해 주심으로 잃었던 생명을 찾아주신 분이시다. 그리고 그 분은 보혜사 성령께 우리를 맡기고 영영 떠나버리지 않고, 다시 돌아오리라 약속하신 분이시다. 이것이 복음이고 진리가 아닌가!
오늘날 우리의 주변은 어떤가? 마치 바닷물이 넘치듯 얼마나 많은 좋은 설교가, 훌륭한 성경지식과 강해가 세상에 가득한가? 책은 홍수를 이루어 쏟아져 나오고, 눈을 돌리는 곳곳에 말씀이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흔하고, 교인이라는 사람들이 그토록 많은데, 정작 사랑의 대상인 내 이웃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대형교회들이 즐비한 조국 대한민국, 세상에 소문난 좋다는 교회, 설교자들이 그렇게 많은 나라에서 오늘과 같이 벌어지고 있는 이 희귀한 사태에 대해서 믿는 사람의 하나로써 부끄럽지 않은가.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오늘 이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가 진정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다시 곰곰이 마음에 새겨야 할 이유가 이것이다. 예수를 닮아야 한다. 강탈당한 자를 불쌍히 여긴 사마리아 사람, 그 영적 진리를 발견해야 한다. 그분이 나의 이웃이고, 내가 내 몸처럼 사랑해야할 대상이고, 내가 그분처럼 되어야 한다. 내 이웃을 향한 진정한 긍휼을 이념의 좌우, 신분의 고저, 빈부의 귀천을 뛰어넘어 절망에 빠진 사람을 불쌍히 여겨야 한다. 더는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비교될 수 없는 절대 진리와 고귀한 사랑을 세상의 조소꺼리로, 비하의 대상으로 전락시키지 말자. 먼저 머리 숙여 회개의 기도를 하게 된다.

이달의 말씀 ㅣ막12:29-3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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