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를 사랑하자, 진정 사랑하자

  • 13/12/2019
  • 28 Views
[유크시론 216호]  이창배 발행인

2019-12월호 사설

밑 둥만 남긴 채 뭉텅 잘려버린 그루터기와 같았던 교회, 그 그루터기에서 한줄기 새 가지가 뻗어나고, 다시 잎사귀를 내고, 꽃을 피우며, 버젓한 나무로 살아나기까지 내 중년의 삶을, 내 가족의 헌신을 토양으로 이 만큼 자란 나무가 됐음이 감사할 뿐이다. 교회에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아이들이 뛰놀고,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찬양이 울려 퍼지는 교회로, 예배가 되살아난 교회가 됐으니 그것으로 나의 사명을 다했다고 단언한다. 오직 감사뿐이다.

오늘따라 아우토반 5번 도로로 다름슈타트를 향해 가는 길이 남달랐다. 늘 자연스럽게 운행하던 길이다. 당연히 가야할 길이기에 한 번도 왜 가는지에 대해 생각도 없이 다니던 길인데, 이제 손꼽아 오늘, 그리고 한 번 더 가면 그 다음엔 기약이 없겠단 생각이 난 것이다.
불현듯 문득 떠오른 생각, “이제부터 많게는 오늘과 한 번 정도만 더 가면 되겠지” 라는 생각이 들면서, “아, 그렇구나! 오늘이 그 동안 섬겨온 교회에서 담임목사로 강단에 서는 일이 마지막 주일이구나!” 하는 느낌이 온 몸에 전해졌다. 잠깐 동안이지만 전율을 느꼈다.
하긴 그런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한 교회를 개척해 근 17년 동안을 애지중지 섬겨온 교회를 사임하고, 그 마지막 예배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않은 적은 없었다. 그럴 것이 지난 밤늦도록, 그리고 주일 아침 일찍부터 머릿속으로 마지막 설교를 어떻게 할까에 대한 고심이 깊었었는데도 불구하고 막상 집을 출발해 교회 근처에 가기 전까지도 실감이 나지 않던 것을 고속도로 주행 중에 느낀 것이다.
이 길을 얼마나 더 다닐 수 있을까? 고작 이제 한, 두 번만 가면 그때부터는 교회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길이 되고 마는 것이라는 생각에 급속히 마음이 가라앉았다. 수많은 자동차들이 저마다 달려가야 할 행선지의 최종 목적지가 있으리라. 그냥 고속도로를 떠도는 자동차는 없다. 지금도 어떤 목적을 가지고 달려가고 있다. 그런데, 이제 내게선 그 목적지를 지우는 카운트다운의 마지막 숫자를 헤아리는 순간이 다가섰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는다.
그렇다. 언젠가 마지막 발걸음을 옮기는 순간이 오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다가오고 마는 그 마지막이라는 순간을 지금 내가 맞이하고 있다는 것이 왠지 어색해진다. 영영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그저 막연했던 감정이 뚜렷하게 실체가 되는 그런 기분, 언젠가 내 삶의 끝에서 마주할 마지막 순간이라는 것도 이런 기분이겠다 싶다.

돌아보면 감사뿐

늘 다니던 길의 의미가 이렇게 다르게 다가오는 것이 신기하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시사철 똑같은 길을 수없이 다녔다 할지라도 그저 무의식적으로 당연한 길을 간 것뿐이었다. 정해진 시계 판을 째깍째깍 맴도는 시계바늘 모양, 주일이면 집과 교회를 오가는 시간, 그 거리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당연하게 순응했던 내 모습이 투영된다. 그랬구나!
어느 누군가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설교하라”고 했다. 내가 철없이 목회해보겠다고 앞뒤 가리지 않고 뛰어들 때, ‘항상 나는 이렇게 목회하리라’고 비장한 각오로 좌우명처럼 여겼던 말씀이 바로 사도행전 20:24이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지금 돌아보면, 참 부끄러운 만용이 아니었나 싶다. 사도 바울에 비하면, 아니 비교할 수 조차 없는 너무도 부족하고 부끄러운 것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오늘까지 몽당연필 같아 제 구실도 못할 자를 장중에 붙잡고 사용하셔서, 아름다운 하나님 나라를 펼쳐주신 주님의 크신 은혜에 한없는 감사를 드린다.
오늘따라 이 말씀이 떠오르며, 지나온 짧다면 짧은 목회여정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부끄럽지만, 그러하지를 못해서 아쉬움이 여운을 남기는 것이 아니겠는가. 조금만 더 열심히 했더라면, 조금만 더 목숨을 바칠 각오로 교회를 돌봤더라면… 하지만 이미 흘러간 시간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나의 결정에 후회는 없다. 미련을 두지 않는다. 오히려 기뻐할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의 인생 가운데 가장 잘한 결정이다. 나의 우유부단함 때문에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는지를 누구보다 나 자신이 잘 알고 있다. 그런 나에게 시간의 연장은 실패의 연장으로 이어질 것이 아니던가 말이다. 그래서 나는 없어지고, 나를 구속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드러나기를 갈망한다. 나의 실패가 곧 주님의 성공이 되는 역전을 믿는다. 그래도 끝까지 남는 감사가 하나있다.

또 감사의 이유

처음 다름슈타트교회에 왔을 때, 이 교회의 상태는 완전한 무너짐 그 자체였다. 오랜 시간 손때 묻은 예배의 기물은 창고에 그대로 남아있는데, 예배하는 사람이 없었다. 너무 큰 충격이었다. 먼지가 쌓이고, 거미줄이 쳐진 그대로 방치된 지나간 교회의 흔적을 대하며 충격도 충격이거니와 눈물이 나왔다. 마음이 너무 아팠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사신 구원을 믿고, 그분이 나의 주되심을 고백하는 사람들이 했던 그 역력한 증거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아픔이었고, 곧, 주님께서 얼마나 비통해 하실까 하는 슬픔으로 다가온 것이다. 그래서 다른 길을 포기하고, 이 교회를 택했다.
밑 둥만 남긴 채 뭉텅 잘려버린 그루터기와 같았던 교회, 그 그루터기에서 한줄기 새 가지가 뻗어나고, 다시 잎사귀를 내고, 꽃을 피우며, 버젓한 나무로 살아나기까지 내 중년의 삶을, 내 가족의 헌신을 토양으로 이 만큼 자란 나무가 됐음이 감사할 뿐이다. 교회에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아이들이 뛰놀고,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찬양이 울려 퍼지는 교회로, 예배가 되살아난 교회가 됐으니 그것으로 나의 사명을 다했다고 단언한다. 오직 감사뿐이다.
그래도 참 고마웠다. 한 교회의 담임목사로서 서게 되는 마지막 강단, 여기저기 눈시울을 붉히고 있는 성도들의 얼굴을 대하는 것이 참 힘들었다. 평소 전혀 눈물을 흘릴 것 같지 않았던 한 성도가 눈물을 훔치고 있는 모습을 보니, 내 마음도 울컥해진다. 찬양을 하는데, 목이 막혀온다. 이러면 안 돼지 하면서 참아내는데도 자꾸 마음이 울컥댄다. 어떤 메시지를 전했는지도 모를 정도로 정신없이 예배를 마쳤다.
일일이 그 동안 목양해 온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담은 편지를 전했다. 담임목사의 무거운 부담을 내려놓는다는 것이 이런 것인지, 편지를 받으며 또 울컥하는 성도의 등을 토닥거리기도 하고, 고맙다고, 감사하다고 인사를 연신하는 그런 성도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 동안의 목회에서 고달프고 힘들었던 기억들이 말끔히 지워져 버린 것만 같다. 주님께 맡기고, 또 새로운 담임목사에게 목양을 맡길 수 있으니 감사하다. 그래야 또 다른 새로운 길을 갈 수 있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싶다.
여기 이렇게 나의 부끄러운 고백을 남기는 이유는 한 가지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핏 값으로 사신 교회를 사랑하자. 진정 사랑하자! 교회가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말고 또 다른 존재의 이유가 있을까?

이달의 말씀 ㅣ디모데후서 4:7-8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Previous Next
Close
Test Caption
Test Description goes like this